오하드 막 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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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하드 막 룬은 스트래스클라이드 왕 룬 압 아르갈의 아들로, 픽트족 왕 키네드 막 알핀의 딸과 결혼한 룬의 아들이었다. 그는 픽트족 엘리트와의 계보적 연관성을 가졌으며, 878년 아에드 막 키나에다가 살해된 후, 11년 동안 픽트족과 스트래스클라이드를 공동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기릭과 공동 통치했으며, 이 기간 동안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확장되었다. 에오차이드는 889년 추방 이후 행적이 묘연하며, 후대의 스코틀랜드 왕 목록에서는 누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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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드 막 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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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
이름 | 오하드 |
원래 이름 | Eochaid mac Rhun |
작위 | 픽트인의 왕 |
재위 | 878년–889년? |
전임자 | 아드 막 키나다 |
후임자 | 돔날 2세 막 카우산틴 |
왕가 | 알핀 가 |
아버지 | 룬 압 아르흐갈 |
어머니 | 키나드 막 알핀의 딸 |
출생일 | 860년경 |
사망일 | 889년 이후 |
추가 정보 | |
영어 이름 | Eochaid ap Rhun, Eochaid map Rhun |
자녀 | Dyfnwal? Lann? |
기타 | King of Strathclyde; and/or King of the Pic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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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에오카이드가 활동하던 시기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과 픽트족의 왕국 모두 중요한 변화를 겪던 때였다. 10세기 무렵부터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111] 알 클루드 상실 이후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경향을 보였으며,[115][116] 이는 노섬브리아 왕국의 쇠퇴와 스칸디나비아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19][120]
한편, 픽트족의 왕국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점차 '알바'(Albamga)로 변모하고 있었다.[131][140] 동시대의 기록들은 '픽트족의 왕'(rex Pictorumla) 대신 '알바의 왕'(rí Albanmga)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137][139] 이는 단순한 명칭 변화를 넘어 정치적, 문화적 전환을 시사한다.[142] 이 시기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과 픽트족의 왕국은 바이킹의 직접적인 공격 기록이 없으며,[124] 두 세력 간의 관계는 협력적이거나 최소한 안정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25]
2. 1.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

10세기가 되어서야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111] 알 클루드(Al Clud)의 상실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영토를 확장하는 시기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115] 정확한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927년까지 왕국의 남쪽 경계는 페스리스 근처의 이몬트 강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다.[116]
이러한 남쪽으로의 확장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정복으로 인해 노섬브리아 왕국이 급격히 쇠퇴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119] 또한,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컴브리아인들과 섬 지역 스칸디나비아인들 사이의 협력이 이러한 확장을 촉진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0] 두 세력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고반(Govan)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주목할 만한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조각품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122]
에오차이드(Eochaid)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이처럼 확장하던 시기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123] 기록에 따르면, 에오차이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이 바이킹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124] 더 나아가,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의 연합은 에오차이드가 브리튼의 영향력을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125]
2. 2. 픽트족 왕국
에오차이드의 전성기 동안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124] 이 시기는 알 클루드의 상실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확장기를 겪던 때로 추정되며,[115] 에오차이드가 이러한 확장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있다.[123]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확장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노섬브리아 왕국이 쇠퇴한 상황과[119]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컴브리아인과 섬 스칸디나비아인 간의 협력 관계에 의해 촉진되었을 수 있다.[120] 이러한 세력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고반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주목할 만한 스칸디나비아풍 조각품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122]
일부에서는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의 연합이 형성되었고, 이 연합이 에오차이드가 브리튼의 권위를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125]
2. 3. 두 왕국의 관계

10세기에 이르러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알 클루드 상실 이후 확장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111][115] 이러한 확장은 노섬브리아 왕국의 약화와 스칸디나비아인과의 협력에 힘입었을 수 있으며,[119][120] 에오카이드가 이 시기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23] 당시 고반에서 발견되는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조각품들은 이러한 세력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122]
에오카이드의 통치 기간 동안 픽트족의 왕국과 브리튼 왕국(스트래스클라이드)은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124] 이는 두 왕국 사이에 일종의 연합이나 협력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이러한 관계가 에오카이드가 스트래스클라이드의 권위를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을 수도 있다.[125]



한편, 픽트족의 왕국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에오카이드 이후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위는 돔날 막 쿠스탄틴에게 계승되었는데,[127] 그는 동시대 자료에서 '알바의 왕'(rí Albanmga)으로 불린 첫 번째 군주이다.[129][139] 다양한 사료에서 용어 사용의 변화는 이 시기에 픽트족 왕국(Pictaviala)이 점차 '알바'(Albamga)로 변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31][140] 예를 들어, 9세기 말까지 아일랜드인을 지칭하던 Scottasang라는 용어가 10세기 초에는 이전의 픽트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133][134]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연대기에서도 870년대 이후 '픽트족의 왕'(rex Pictorumla) 대신 '알바의 왕'(rí Albanmga)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137][139]

이러한 '알바'로의 변혁이 기릭과 에오카이드 시대에 시작되었다면, '알바'는 단순히 픽트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픽트족, 게일족, 브리튼족(스트래스클라이드), 그리고 잉글랜드계 주민까지 포함하는 다민족적인 정치체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있다.[151] 이전에는 '브리튼' 섬 전체를 의미했던 Albamga라는 용어가[130] 이 새로운 정치적 실체, 즉 "북 브리튼"의 정체성을 포괄하기 위해 채택되었을 수 있다.[151] 알피니드 왕가(돔날 막 쿠스탄틴의 가문)가 일시적으로 픽트 왕위에서 밀려나 아일랜드와 연관을 맺었던 점[146](예: 에오카이드의 이모인 마엘 무이레 인겐 키나다가 아일랜드의 왕들과 혼인[147]) 등은 당시 알바 왕국과 주변 지역 간의 복잡하고 유동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3. 에오카이드의 생애와 통치
에오하이드 막 룬(Eochaid mac Run|에오하이드 막 룬gd)은 9세기 후반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과 픽트족의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 룬 압 아르흐갈의 아들이자, 픽트족의 강력한 왕이었던 키나드 막 알핀의 외손자로,[8][10][11] 브리튼계와 픽트계 양쪽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이러한 이중적 혈통 배경은 그가 훗날 픽트족 왕위 계승에 관여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
에오하이드의 시대는 격동기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아르흐갈 압 더픈왈 왕의 통치 말기인 870년,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랜 수도였던 알 클루트 요새가 바이킹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되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19] 이후 아르흐갈은 872년, 픽트족 왕 카우산틴 막 키나다(에오하이드의 외삼촌)의 사주로 암살당했다.[23] 아버지 룬이 왕위를 계승했으나,[26] 그의 통치 기간과 사망 시점은 기록이 불분명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35]
아버지 룬 이후 에오하이드가 왕위에 오른 과정 역시 명확하지 않다. 픽트족의 왕 아드 막 키나다(에오하이드의 또 다른 외삼촌)가 878년 내부 정쟁으로 사망한 후,[47][48] 에오하이드는 기릭이라는 인물과 함께 픽트족의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4] ''알바 왕 연대기''는 기릭이 에오하이드의 보호자(alumnus|알룸누스la)이자 왕위 계승자(ordinator|오르디나토르la) 역할을 했다고 전하며,[54][56][58] 두 사람이 약 11년간 공동으로 통치했음을 시사한다.[54] 그러나 두 사람의 정확한 관계(동맹, 경쟁, 혹은 보호-피보호)와 통치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하며,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100][102][108]
에오하이드의 통치 시기는 픽트족 왕국이 점차 게일족의 영향을 받아 알바 왕국으로 변모해가는 중요한 전환기였다.[131][142] 이 시기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 역시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15][123] 에오하이드와 기릭의 통치는 885년 일식 사건 이후[61] 불안정해졌을 수 있으며, ''알바 왕 연대기''에 따르면 결국 889년경 두 사람 모두 왕국에서 추방되었다.[54][127]
추방 이후 에오하이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165][167] 기릭은 이후 던던에서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168] 에오하이드의 최후는 불분명하다. 그는 후대의 스코틀랜드 왕 목록에서 종종 누락되는 등,[162] 알핀 왕조 중심의 역사 서술 속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후손으로 10세기 초 스트래스클라이드 왕 더픈왈이나[181] 딸 란 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182][184][183][185][186]
3. 1. 가계와 출생
에오카이드는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 룬 압 아르트갈의 아들이다.[8] 룬의 부계 혈통은 10세기 웨일스 족보 모음집인 ''Harleian genealogies''에 기록되어 있으며, 알 클루드(Al Clud) 왕들의 오랜 가계에서 유래했음을 보여준다.[9] 9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작성된 ''Chronicle of the Kings of Alba''에 따르면, 룬은 픽트족의 왕 키나드 막 알핀의 딸과 결혼했으며,[10] 에오카이드는 이들의 아들이다.[11]
에오카이드라는 이름은 그의 모계 혈통, 즉 픽트족과의 연관성을 시사할 수 있다.[13] 게일어 이름 Eochaidmga에 해당하는 알려진 브리튼어 형태는 없다. 이론적으로 이 이름의 픽트어 형태는

에오카이드의 할아버지이자 룬의 아버지인 아르트갈 압 디븐왈은 알 클루드의 왕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 중인 870년, 알 클루드 요새는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왕 암라브와 이마르에게 점령되고 파괴되었다.[19] 다음 해, 암라브와 이마르는 많은 포로들과 함께 아일랜드로 돌아갔다.[20] 아르트갈은 872년에 사망했는데,[21] ''Annals of Ulster''[22]와 ''Chronicon Scotorum''은 그가 룬의 매형인 픽트족의 왕 쿠스탄틴 막 키나다의 사주로 살해되었다고 기록한다.[23] 아르트갈의 암살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25]
룬의 통치는 아버지 아르트갈의 죽음 직후인 872년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26] 알 클루드 요새의 파괴 이후, 왕국의 중심지는 클라이드 강 상류의 고반[30]이나 파틱[31] 지역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부터 왕국의 명칭도 요새 이름을 딴 '알 클루드 왕국' 대신 클라이드 계곡을 의미하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3] 아르트갈 또는 룬이 재편된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을 다스린 첫 군주일 수 있다.[34]

룬의 통치와 삶이 언제 끝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5] 한 가지 가능성은 룬이 876년 바이킹에 의해 살해된 그의 매형 쿠스탄틴과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36]
3. 2. 왕위 계승

아일랜드 연대기에 따르면, 아드는 마지막 픽트족의 왕이었다. 그러나 다른 자료들은 아드의 뒤를 이어 에오하이드와 기릭이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44]
아버지 룬 막 아르흐갈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위를 누가 계승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45] 만약 룬과 카우산틴 막 키네다가 모두 876년에 사망했다면, 에오하이드는 그의 아버지를 이어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46] 확실한 것은 카우산틴의 형제인 아드 막 키네다가 픽트족의 왕으로 즉위하여 2년 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는 점이다.[47] ''얼스터 연대기''는 아드가 자신의 동료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는 반면,[48] 일부 중세 왕 목록에는 그가 기릭이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9] 아드 이후 누가 왕위를 계승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몇 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50]

''알바 왕 연대기''에 따르면, 에오하이드는 아드의 뒤를 이어 11년 동안 왕위를 차지했다. 이 연대기는 또한 기릭이 에오하이드의 alumnus|알룸누스lat[54]("양아버지",[55] "보호자")[50]이자 ordinator|오르디나토르lat[54]("보호자",[56] "통치자",[57] 또는 "왕위 계승자")[58]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함께 통치했다고 기록한다. 그들의 통치 기간 중 성 키리시우스의 축일에 일식이 있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왕국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54]
이 연대기는 아드 핀들리아흐 막 넬이 에오하이드 통치 2년차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아드가 실제로 879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연대기의 기록은 에오하이드 통치 시작 시점을 비교적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59] 일식에 관해서는, 연대기가 이를 에오하이드 통치 마지막 해와 연관시키는 듯 하지만,[60] 실제로는 885년 6월 16일에 발생한 일식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61] 6월 16일은 성 키리쿠스의 축일이기도 하다.[62] 연대기와 ''얼스터 연대기''에 기록된 날짜들은 이전 통치와 다음 통치 사이에 11년의 간격을 보여주므로, 일식이 실제로 에오하이드의 통치 기간 중에 발생했음은 분명하다.[68] 연대기가 일식 발생 시점을 통치 마지막 해로 기록한 것은, 주목할 만한 천문 현상을 에오하이드의 추방과 연결하여 정권 교체의 극적인 효과를 높이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69]
연대기 외에 에오하이드와 기릭을 모두 왕으로 언급하는 유일한 자료는 12세기의 ''베르칸의 예언''이다.[70] 이 예언에 따르면, 에오하이드는 13년 동안 왕으로 통치하다가 쫓겨났고, 그의 뒤를 이어 "행운의 아들"로 묘사된 기릭이 왕위에 올랐다.[71] 두 자료 간의 이러한 불일치는 부분적으로 민족적 편견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베르칸의 예언''은 에오하이드의 브리튼 혈통을 비판적으로 보는 반면, 기릭은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칭송받고 있다.[72]
10세기가 되어서야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다시 나타난다.[111] 알트 클루트 상실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115] 정확한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927년까지 남쪽 국경은 펜리스 근처의 이몬트 강까지 도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16] 이러한 남쪽 확장은 노섬브리아 왕국이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정복으로 인해 급격히 쇠퇴한 덕분일 수 있으며,[119] 9세기 말과 10세기 초 컴브리아인들과 섬 스칸디나비아인들 사이의 협력 관계에 의해 촉진되었을 수도 있다.[120] 이러한 세력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고반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주목할 만한 스칸디나비아 양식 조각품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122] 에오하이드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확장되던 이 시기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123] 에오하이드의 전성기 동안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이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124] 더욱이,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의 연합은 그가 브리튼의 권위를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125]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에 관해서는, ''알바 왕 연대기''가 후계자로 돔날 막 카우산틴을 지목한다.[127] 돔날의 왕위 계승은 그의 사망(900년)을 기록한 ''얼스터 연대기''와 ''스코티룸 연대기''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128] ''알바 왕 연대기''가 돔날에게 11년의 통치 기간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그의 통치가 889년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며, 이는 에오하이드에게 부여된 11년의 통치 기간과 일치한다.[127] 돔날은 동시대 연대기 자료에서 알바의 왕(mga)으로 칭해진 최초의 군주이다.[129] 이 시기 이전에는 게일어 Alba|알바mga가 "브리튼" 전체를 의미했다.[130] 실제로, 다양한 영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어 자료에서 사용된 용어의 변화는 이 시기에 픽트족 왕국이 급격한 변화를 겪었음을 시사하는 증거일 수 있다.[131]
예를 들어,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890년대까지 아일랜드인을 Scottas|스코타스ang로 지칭한다.[133] 그러나 920년대에 이르러 이 용어는 이전에 픽트족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134] (픽트족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870년대였다).[135] 아일랜드 연대기의 경우, Picti|픽티lat와 rex Pictorum|렉스 픽토룸lat("픽트족의 왕")이라는 용어는 870년대에 픽트족과 그들의 왕에게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137] 실제로, 이 칭호로 불린 마지막 픽트족 왕은 돔날의 삼촌인 아드였다.[138] 900년대에 이르러서는 fir Alban|피르 알반mga("알바의 사람들")과 rí Alban|리 알반mga("알바의 왕")이라는 용어가 이들에게 사용되었다.[139] ''알바 왕 연대기''는 돔날의 통치 중에 Pictavia|픽타비아lat라는 용어를 마지막으로 사용하며, 그 이후 왕국은 Albania|알바니아lat로 불린다.[140]
9세기 마지막 4분기에 픽트족 왕국이 겪었던 정치적, 왕조적 혼란이 알핀 가의 왕위 복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질서의 촉매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42] 또는, 이러한 변화가 특히 기릭과 에오하이드의 시대에 일어났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릭은 픽타비아를 괴롭히던 끊임없는 바이킹 약탈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왕위를 차지했을 수 있다. 이전 시기에 게일족의 달 리어타 왕국이 이러한 압력으로 붕괴된 것으로 보이는데, 기릭이 이 붕괴된 왕국에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픽트족 왕위를 강탈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떠한 경우든, 흔들리는 픽트족 왕국 내에서 상당한 게일족 귀족 세력이 부상한 것은 픽타비아가 결국 알바로 변모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143]
알핀 가문이 일시적으로 픽트 왕위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할 수 있다.[146] 실제로 돔날의 고모인 마엘 무이레 인겐 키네다는 두 명의 연속적인 타라의 왕인 아드 핀들리아흐 막 넬과 플란 신나 막 마엘 세크나일의 아내였고,[147] 또 다른 왕인 니얼 글룬두브 막 아다의 어머니로서 아일랜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148] 만약 돔날과 그의 뒤를 이은 사촌 카우산틴 막 아다가 알바의 왕위를 차지하기 전에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그들의 게일 문화권 성장 배경은 픽타비아의 게일화를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146] 에오하이드와 기릭의 최종적인 알핀 가 후계자들이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보호받았다면, 이것이 ''아일랜드 연대기''가 그들의 왕위 찬탈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다.[149]
만약 픽트 왕국의 변화가 실제로 기릭과 에오하이드 시대에서 비롯되었다면, 새로운 용어 '알바'는 알바 왕국이 픽트족, 게일족, 브리튼족, 그리고 앵글로색슨족 거주민을 포함하는 것으로 구상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151] 여러 왕 목록은 기릭이 통치 기간 동안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정복했다고 주장하는데,[152]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그의 권위 아래 있던 다민족 북부 연합체를 나타내는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따라서 이전에 브리튼을 의미했던 Alba|알바mga라는 용어가 새로운 정치적 실체, 즉 "북부 브리튼" 전체를 포괄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51]
에오하이드와 기릭의 통치 시기는 불분명하고 불확실하지만, 기릭은 결국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어 픽트족으로부터 게일 교회를 해방시키고,[155]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이룬 인물로 여겨졌다.[156] 반면 에오하이드는 '알바 왕 연대기'와 '베르칸의 예언'에 의해서만 기록된다.[161] 기릭과 달리, 후기 중세 시대의 왕 목록과 연대기들은 스코틀랜드 역사 기록에 에오하이드를 포함시키지 않는다.[162] 실제로 에오하이드와 후대의 알핀 가 왕인 알라브 막 일둘브는 왕 목록에 기록되지 않은 유일한 스코틀랜드 왕들이다.[163] 에오하이드와 기릭이 통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시기는 키네드 막 알핀과 마엘 콜룸 막 키네다 사이의 기간 중 알핀 가문이 픽트/알바 왕국을 통치하지 않은 유일한 시기이다.[164]
에오하이드는 889년 추방 이후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165] 그의 사망 날짜는 기록되지 않았고[166] 알려져 있지 않다.[167] 여러 왕 목록에 따르면 기릭은 던던에서 살해되었다.[168] 유적지에서 발견된 광범위한 소각 흔적은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요새 사용의 종말을 나타낼 수 있다.[172] 기릭의 몰락에 대한 설명이 사실이라면, 당시 그와 에오하이드가 동맹 관계였다면 에오하이드 역시 기릭과 함께 몰락했을 가능성이 있다.[176] 또는 기릭의 살해가 에오하이드가 왕위에서 쫓겨나는 데 기여했을 수도 있다.[177] 기릭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인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후계자인 돔날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178] 혹은 돔날을 지지하는 유력자들이 그의 왕위 계승 길을 열어주었을 수도 있다.[179]

10세기 초까지 스트래스클라이드 왕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알바 왕 연대기'는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이었던 어떤 더픈왈(Dyfnwal)의 죽음을 기록한다.[181] 더픈왈의 부모는 불분명하다. 그는 룬의 또 다른 아들이었을 수도 있고,[182] 에오하이드의 아들[184] 또는 손자[183]로서 그의 후손일 수도 있다. 혹은 같은 왕조의 더 먼 친척일 수도 있다.[185] 에오하이드에게는 또한 12세기 '레칸 대서'의 한 버전인 '반셴하스'에 기록된 딸 라그날(Lann)이 있었을 수 있으며, 그녀는 니얼 글룬두브의 아내였다고 한다.[186] 따라서 '반셴하스'를 따른다면, 에오하이드의 외손자는 라그날의 아들인 무르케르타흐 막 넬이다.[187]
3. 3. 기릭과의 공동 통치



에오카이드 막 룬과 함께 통치한 기릭의 가계는 명확하지 않다.[74] 여러 버전의 ''알바 왕 연대기''는 그의 아버지를 Dúngal|둔갈mga이라 기록하지만,[75] 다른 기록에서는 Domnall|돔날mga로 보기도 한다.[76] 기릭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만한 조상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며,[77] 그가 직접 왕위를 노리기보다 아에드 막 키네다를 제거하고 에오카이드를 왕위에 앉히는 킹메이커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78][79]
일각에서는 기릭의 아버지 이름 '둔갈'이 실제로는 웨일스어 Dyfnwal|더픈왈cy의 초기 형태일 수 있다고 본다.[82] 만약 그렇다면, 기릭은 알트 클루트의 왕 룬 압 아르흐갈의 처남이자 아르흐갈 압 더픈왈의 형제였을 수 있으며, 아에드를 살해한 것은 쿠스탄틴 막 키네다의 지시로 살해된 아르흐갈에 대한 복수였을 수 있다.[87][88] 이 경우, 에오카이드는 외삼촌인 기릭의 보호 아래 통치했을 수 있다.[89] 다른 가능성으로, 기릭이 돔날 막 알핀의 아들이었다면, 그는 픽트족 왕위에 대한 강력한 계승권을 가졌을 것이며, 아에드가 왕위를 계승하자 이에 반발하여 에오카이드와 협력했을 수 있다.[92][93][94][95]
반대로 에오카이드가 외가인 알핀 왕가의 권리를 통해 왕위를 주장했을 수도 있다.[96] 이 경우, 에오카이드는 기릭과 동맹을 맺거나,[97] 혹은 기릭의 보호 아래 있는 어린 왕이었을 수 있다.[46] ''알바 왕 연대기''에서 사용된 ordinator|오르디나토르la라는 용어는 기릭이 에오카이드를 왕으로 세웠음을 시사할 수 있다.[98][99]
에오카이드와 기릭의 공동 통치 형태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에오카이드가 스트래스클라이드의 브리튼족과 픽트족 모두를 통치했을 가능성,[100] 혹은 에오카이드가 브리튼 왕국을, 기릭이 픽트족 왕국을 나누어 통치했을 가능성도 있다.[102] 기릭이 에오카이드의 통치 기간 동안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수도 있다.[103] 이 시기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알트 클루트 상실 이후 남쪽으로 확장했을 수 있으며,[115] 이는 노섬브리아 왕국의 약화와 바이킹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119][120][123] 고반에서 발견된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조각들은 이러한 관계를 뒷받침할 수 있다.[122] 한편, 두 사람의 관계가 동맹이 아닌 경쟁 관계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08] ''베르찬의 예언''은 기릭의 통치 기간 동안 브리튼인들이 종속되었음을 암시하며, 이는 두 사람 사이의 적대 관계를 보여줄 수 있다.[109]
이 시기는 픽트족 왕국이 알바 왕국으로 변모하는 중요한 전환기였다. 에오카이드와 기릭의 통치 이후 돔날 막 쿠스탄틴이 왕위를 계승하며, 그는 동시대 기록에서 '알바의 왕'(rí Alban|리 알반mga)으로 칭해진 최초의 군주이다.[127][129] 이전까지 '픽트족의 왕'(rex Pictorum|렉스 픽토룸la)으로 불리던 군주의 칭호와 '픽타비아'(Pictavia|픽타비아la)로 불리던 왕국의 명칭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한다.[137][139][140] 이러한 변화는 9세기 후반 픽트족 왕국이 겪었던 정치적 혼란과 바이킹의 침입 속에서 기릭과 같은 인물들이 게일족 세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게일족의 영향력이 커진 결과일 수 있다.[142][143] 또한, 알핀 왕가의 일부가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이들의 게일족 배경 역시 픽트족 지역의 게일화에 기여했을 수 있다.[146] 새롭게 등장한 '알바'라는 명칭은 픽트족, 게일족, 브리튼족, 잉글랜드인 등을 아우르는 다민족적인 정치체를 의미했을 가능성도 있다.[151]
에오카이드와 기릭의 통치는 889년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 에오카이드는 추방된 이후 기록이 없으며,[165] 사망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다.[166][167] 기릭은 던던에서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168] 던던 유적지의 소각 흔적은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172] 두 사람이 함께 몰락했거나, 기릭의 죽음이 에오카이드의 추방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176][177] 기릭의 살해 배후는 명확하지 않지만, 후계자인 돔날 막 쿠스탄틴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178]
후대에 기릭은 게일 교회를 해방시키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정복한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었지만,[155][156] 에오카이드에 대한 기록은 매우 희소하다.[161] 그는 후대의 왕 목록에도 포함되지 않았다.[162] 이들의 통치 시기는 키네드 막 알핀과 말 콜룸 막 키네다 사이 알핀 왕조가 픽트/알바 왕위를 장악하지 못한 유일한 기간으로 기록된다.[164] 에오카이드의 후손으로는 10세기 초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이었던 드프날[181]과 니얼 글룬두브 막 아에다의 아내였던 딸 라안[186]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182][184][183][185]
3. 4. 통치 기간의 주요 사건
10세기에 이르러서야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111] 알 클루드(덤바튼 록)를 상실한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영토를 확장하는 시기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115] 정확한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927년경에는 왕국의 남쪽 국경이 컴브리아 페리스 근처의 이몬트 강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16] 이러한 남부 확장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노섬브리아 왕국이 급격히 쇠퇴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119] 9세기 말과 10세기 초 컴브리아인들과 섬 스칸디나비아인들 사이의 협력 관계에 의해 촉진되었을 수도 있다.[120]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고반(Govan)에서 발견된 주목할 만한 동시대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조각품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122] 에오차이드가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이러한 확장기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123] 기록상 에오차이드의 전성기 동안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이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은 없다.[124] 오히려 두 왕국의 연합이 에오차이드가 브리튼의 권위를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125]
에오차이드와 기릭의 공동 통치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161] 기릭은 후대에 픽트족으로부터 게일 교회를 해방시키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이룬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었다.[155][156] 반면 에오차이드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으며, 후대의 왕 목록이나 연대기에서는 종종 누락되기도 한다.[162] 에오차이드와 기릭이 통치했던 시기는 알핀 왕조가 픽트/알바 왕국을 통치하지 않은 유일한 기간으로 추정된다.[164]
에오차이드는 889년 추방된 이후 기록에서 사라지며,[165] 그의 사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166][167] 여러 왕 목록에 따르면 기릭은 던던에서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168] 던던 유적지에서 발견된 광범위한 소각 흔적은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요새 사용의 종말을 시사할 수도 있다.[172] 만약 기릭의 몰락에 대한 설명이 사실이고 당시 에오차이드와 기릭이 동맹 관계였다면, 두 사람이 함께 몰락했을 가능성도 있다.[176] 또는 기릭의 죽음이 에오차이드가 왕위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177] 기릭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인물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후계자인 도날 막 코살란틴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178]
3. 5. 추방과 죽음
에오차이드는 889년 추방 이후 기록에서 사라지며,[165] 그의 사망 날짜는 기록되지 않아[166] 정확히 알 수 없다.[167]
한편, 에오차이드와 함께 통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릭은 여러 왕 목록에 따르면 던던에서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168] 던던 유적지에서 발견된 광범위한 소각의 증거는 기릭의 최후와 관련된 사건일 수 있으며, 이는 요새 사용의 종말을 의미할 수도 있다.[172] 만약 기릭의 몰락에 대한 기록이 사실이고, 그와 에오차이드가 당시 동맹 관계였다면, 두 사람이 함께 몰락했을 가능성도 있다.[176] 다른 가능성으로는 기릭의 살해가 에오차이드가 왕위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177] 기릭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인물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후계자인 도날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178] 또는 도날을 지지하는 유력자들이 그의 왕위 계승 길을 열어주었을 수도 있다.[179]
에오차이드의 직접적인 최후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혈통은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10세기 초까지 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의 왕위에 대한 기록은 없다가,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 스트라스클라이드의 어떤 드프날(Dyfnwal)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181] 드프날의 부모는 확실하지 않지만, 에오차이드의 아버지인 룬(Rhun)의 또 다른 아들이거나,[182] 에오차이드의 아들[184] 또는 손자[183]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는 같은 왕조의 더 먼 친척일 수도 있다.[185] 또한, 12세기 '반센카스' 기록에 따르면 에오차이드에게는 라안(Laan)이라는 딸이 있었고, 그녀는 닐 글룬드브와 결혼했을 수 있다.[186]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에오차이드의 외손자는 라안의 아들인 머치타흐 막 네일이 된다.[187]
4. 픽트 왕국의 변화
에오카이드의 통치 기간 동안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은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124] 오히려 이 시기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확장기를 겪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때이다.[115] 일부 학자들은 에오카이드가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이러한 확장 기간 동안 통치했을 수 있다고 본다.[123]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의 연합, 즉 에오카이드의 공동 통치가 스트래스클라이드의 권위가 남쪽으로 확장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125]
한편, 9세기 마지막 4분기 동안 픽트 왕국이 겪었던 정치적, 왕조적 격변은 이후 알바 왕국으로 이어지는 급격한 변화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142] 이러한 변화, 즉 왕국의 정체성 변화와 게일 문화의 확산은 기릭과 에오카이드의 통치 기간 동안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43][151] 이 시기 픽트 왕국 내부에 상당한 게일 귀족 세력이 자리 잡게 되면서, 왕국의 성격이 점차 변화하여 결국 '픽타비아'가 '알바'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을 수 있다.[143] 왕국의 명칭 변화와 게일화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4. 1. 왕국 명칭의 변화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한 왕은 ''알바 왕 연대기''에 의해 돔날 막 쿠스탄틴으로 확인된다.[127] 돔날의 왕위 계승은 900년에 그의 죽음을 기록한 ''얼스터 연대기''와 ''스코티룸 연대기''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128] ''알바 왕 연대기''가 돔날에게 11년의 통치 기간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그의 통치가 889년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며, 이는 에오카이드에게 부여된 11년의 통치 기간과 일치한다.[127] 돔날은 동시대 연대기 자료에서 알바의 왕으로 칭해진 최초의 군주이다.[129] 이 시기 이전에는 게일어 Alba|알바mga가 "브리튼"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였다.[130] 실제로 다양한 영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어 자료에서 사용된 용어의 변화는 이 시기에 픽트족 왕국이 급격한 변화를 겪었을 수 있다는 중요한 증거로 여겨진다.[131]
예를 들어,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890년대까지 아일랜드인을 Scottas|스코타스ang라고 지칭했다.[133] 그러나 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 용어가 이전에는 픽트족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했다[134] (픽트족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870년대였다).[135] 아일랜드 연대기의 경우, 라틴어 용어인 Picti|픽티la(픽트족)와 rex Pictorum|렉스 픽토룸la("픽트족의 왕")은 870년대에 픽트족과 그들의 왕에게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137] 실제로 이 칭호로 불린 마지막 픽트족 왕은 돔날의 삼촌인 아에드였다.[138] 900년대에 이르러서는 게일어 용어인 fir Alban|피르 알반mga("알바의 사람들")과 rí Alban|리 알반mga("알바의 왕")이 이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139] ''알바 왕 연대기'' 자체도 돔날의 통치 기간 중에 라틴어 Pictavia|픽타비아la라는 용어를 마지막으로 사용하며, 그 이후 왕국은 Albania|알바니아la로 불린다.[140]
9세기 마지막 4분기에 픽트족 왕국이 겪었던 정치적, 왕조적 격변은 알피니드 왕조의 왕위 재확립을 기반으로 한 급진적인 새로운 정치 질서의 촉매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42]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변혁이 기릭과 에오카이드의 시대에 일어났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릭이 픽타비아를 괴롭힌 끊임없는 바이킹 약탈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왕위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시기 이전에 게일족의 달라 리아타 왕국은 이러한 압력으로 붕괴된 것으로 보이며, 기릭이 이 붕괴된 국가에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픽트족 왕위를 강제로 차지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흔들리는 픽트족 왕국 내에서 상당한 게일족 귀족 세력이 수용된 것은 픽타비아가 결국 알바로 변모하게 된 중요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143] 알피니드 가문이 일시적으로 픽트족 왕위에서 배제되었던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46] 실제로 돔날의 아버지 쪽 이모인 마엘 무이레 인겐 키나다는 두 명의 연속적인 타라의 왕(아드 핀들리아스와 플란 신나 막 마일 세크날)의 아내였고, 또 다른 왕(니얼 글룬두브 막 아에다)의 어머니로서 아일랜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147][148] 만약 돔날과 그의 뒤를 이은 사촌 쿠스탄틴 막 아에다가 알바의 왕위를 차지하기 전에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면, 그들의 게일족 배경은 픽타비아의 게일화를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146]
픽트족 왕국의 변혁이 실제로 기릭과 에오카이드의 시대에 시작되었다면, '알바'라는 새로운 용어는 알바 왕국이 픽트족, 게일족, 브리튼족, 그리고 잉글랜드계 거주민까지 포함하는 다민족적인 실체로 구상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151] 여러 왕 목록에서 기릭이 통치 기간 동안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정복했다고 주장하는 것은[152] 문자 그대로의 정복이라기보다는 그의 권위 아래 통합된 다민족 북부 연합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이전에 브리튼 섬 전체를 의미했던 게일어 Alba|알바mga가 새로운 정치적 구성체, 즉 '북 브리튼'이라는 정체성을 포괄하기 위한 용어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51]
4. 2. 게일화
에오카이드와 기릭의 통치 이후, 알바 왕 연대기에 따르면 돔날 막 쿠스탄틴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127] 돔날의 즉위는 900년에 그의 죽음을 기록한 ''얼스터 연대기''와 ''스코티룸 연대기''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128] ''알바 왕 연대기''는 돔날의 통치 기간을 11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통치가 889년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며, 에오카이드에게 부여된 11년의 통치 기간과 일치한다.[127] 돔날은 동시대 연대기 자료에서 알바의 왕( rí Albanmga )으로 칭해진 최초의 군주이다.[129] 이 시기 이전까지 게일어 Albamga는 일반적으로 "브리튼" 섬 전체를 의미했다.[130] 영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어 등 다양한 자료에서 사용된 용어의 변화는 이 시기에 픽트족 왕국이 급격한 변화, 즉 게일화를 겪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131]
예를 들어,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890년대까지 아일랜드인을 Scottasang라고 불렀지만,[133] 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전에 픽트족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34] (픽트족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870년대였다.)[135] 아일랜드 연대기의 경우, Pictila(픽트족)와 rex Pictorumla("픽트족의 왕")이라는 라틴어 용어는 870년대에 픽트족과 그들의 왕에게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137] 실제로 이 칭호로 불린 마지막 픽트족 왕은 돔날의 삼촌인 아에드 막 키나다였다.[138] 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게일어 fir Albanmga("알바의 사람들")과 rí Albanmga("알바의 왕")이 사용되었다.[139] ''알바 왕 연대기'' 역시 돔날의 통치 중에 라틴어 Pictaviala라는 용어를 마지막으로 사용하고, 그 이후로는 왕국을 Albaniala라고 칭한다.[140]
9세기 마지막 4반세기 동안 픽트족 왕국이 겪었던 정치적, 왕조적 격변은 알핀 왕가의 왕위 재확립을 기반으로 한 급진적인 새로운 정치 질서, 즉 게일화의 촉매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42]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특히 기릭과 에오카이드의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났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릭이 픽타비아를 괴롭혔던 끊임없는 바이킹 약탈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왕위를 차지했을 수 있다. 이 시기 이전, 게일족의 달 리어타 왕국은 이러한 압력으로 인해 붕괴된 것으로 보이는데, 기릭이 이 붕괴된 왕국에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픽트족 왕위를 강제로 차지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어떤 경우든, 불안정한 픽트족 왕국 내에서 상당한 게일족 귀족 세력의 수용은 픽타비아가 결국 알바로 변모하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143]
알핀 왕가가 일시적으로 픽트족 왕위에서 배제되었던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146] 실제로 돔날의 아버지 쪽 고모인 마엘 무이레 인겐 키나다는 두 명의 연속적인 타라 왕(아에드 핀들리아스와 플란 신나 막 마일 세크날)의 아내였고, 또 다른 타라 왕(니얼 글룬두브 막 아에다)의 어머니로서 아일랜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147][148] 만약 돔날과 그의 뒤를 이은 사촌 쿠스탄틴 막 아에다가 알바의 왕위를 차지하기 전에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그들의 게일 문화권 성장 배경은 픽타비아의 지속적인 게일화를 촉진했을 수 있다.[146] 에오카이드와 기릭의 최종적인 알핀 왕가 후계자들이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보호를 받았다면, 이는 아일랜드 연대기가 그들의 왕위 계승(찬탈로 간주될 수 있는)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다.[149]
픽트족 왕국의 변혁이 실제로 기릭과 에오카이드 시대에 시작되었다면, 새롭게 등장한 '알바'라는 용어는 단순히 게일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픽트족, 게일족, 브리튼족, 그리고 잉글랜드계 거주민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다민족 왕국을 구상했음을 나타낼 수도 있다.[151] 여러 왕 목록에서 기릭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정복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는 그의 권위 아래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북부 동맹이 존재했음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이전에 브리튼 섬 전체를 의미했던 Albamga라는 용어가 이제는 "북부 브리튼"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실체를 포괄하기 위해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51]
5.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확장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10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111] 알 클루드의 상실 이후, 왕국은 영토를 확장하는 시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115] 이 확장의 정확한 연대기는 불확실하지만, 남쪽으로 상당한 진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16] 이러한 영토 확장은 노섬브리아 왕국의 약화와 같은 주변 정세 변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119] 바이킹 세력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120] 에오차이드가 통치하던 시기가 바로 이 스트래스클라이드의 확장기와 일치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123]
5. 1. 남쪽으로의 확장
10세기가 되어서야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111] 알 클루드의 상실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영토를 확장하는 시기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115] 정확한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927년까지 왕국의 남쪽 국경은 페리스 근처의 이몬트 강에 도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16]
이러한 남쪽 확장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정복으로 인해 노섬브리아 왕국이 급격히 쇠퇴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119] 또한, 9세기 말과 10세기 초 컴브리아인들과 섬 지역 스칸디나비아인들 사이의 협력이 확장을 촉진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0] 두 세력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고반에서 발견된 주목할 만한 동시대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조각품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122]
에오차이드가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이러한 확장기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123] 기록상 에오차이드의 전성기 동안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은 바이킹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124] 더 나아가,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의 연합이 에오차이드로 하여금 브리튼의 권위를 남쪽으로 확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을 수도 있다.[125]
5. 2. 확장 배경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역사에 대한 자료는 10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난다.[111] 알 클루드(Alt Clut, 현재의 덤버턴 록)의 상실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은 영토를 확장하는 시기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115] 정확한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927년까지 왕국의 남쪽 국경은 페리스 근처의 이몬트 강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116]
이러한 남쪽으로의 확장은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해 노섬브리아 왕국이 급격히 쇠퇴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119] 또한,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컴브리아인(스트래스클라이드의 브리튼족)과 섬 지역의 스칸디나비아인(Norse-Gaels) 사이의 협력이 확장을 촉진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0] 두 세력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고반 지역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주목할 만한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조각품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122]
에오차이드가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확장기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123] 기록에 따르면 에오차이드의 전성기 동안에는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스트래스클라이드)이 바이킹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124] 더 나아가,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의 연합이 에오차이드가 브리튼의 영향력을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125]
6. 유산과 역사적 평가
에오카이드 막 룬의 통치는 스코틀랜드 왕국 형성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이루어졌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제한적이다. 공동 통치자로 여겨지는 기릭이 후대에 게일 교회를 해방시키고 군사적 정복을 이룬 전설적인 인물로 기록된 것과 달리,[155][156] 에오카이드는 '알바 왕 연대기'와 '베르찬의 예언' 등 소수의 기록에만 단편적으로 등장할 뿐,[161] 후대의 주요 왕 목록이나 연대기에서는 종종 누락되었다.[162] 실제로 에오카이드와 후대의 알라브 막 일루일브는 왕 목록에 기록되지 않은 유일한 알바의 왕들이다.[163]
이러한 기록상의 부족함은 에오카이드와 기릭의 통치가 케네스 1세(키네드 막 알핀)부터 말 콜룸 2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알핀 왕조가 픽트 또는 알바 왕위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시기였다는 점과 관련될 수 있다.[164] 후대의 알핀 왕조 중심의 역사 서술 과정에서 그의 존재나 역할이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49] 그의 최후 역시 889년 추방되었다는 기록 이후로는 불분명하며,[165][166][167] 기릭이 살해된 장소로 알려진 던던에서 함께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도 있다.[17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오카이드의 통치 시기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남쪽으로 확장하던 때와 겹칠 수 있으며,[115][123] 픽트족 중심의 왕국이 게일족, 브리튼족 등을 포괄하는 알바 왕국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과정에 놓여 있었다.[151] 비록 직접적인 기록은 부족하지만, 10세기 초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 드프날이 그의 후손일 가능성[181][184][183] 이나, 딸 라안(Laan)을 통해 아일랜드 왕가와 연결되었을 가능성[186] 등은 그의 역사적 영향력이 그의 사후에도 간접적으로나마 이어졌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6. 1. 스코틀랜드 왕국 형성에 대한 기여
오하드 막 룬의 통치 시기는 픽트족의 왕국이 알바 왕국, 즉 초기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과도기에 해당한다. 비록 오하드 자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고 후대에 거의 잊혔지만,[161][162] 그의 존재와 통치는 스코틀랜드 형성기의 복잡한 정치 및 민족적 상황을 반영한다.
오하드는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 룬(Rhun)의 아들이자, 어머니를 통해 픽트족의 왕 키나드 막 알핀(Cináed mac Ailpín)의 외손자였다.[10][11] 이러한 혈통은 당시 브리튼계 왕국과 픽트계 왕국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878년, 픽트의 왕이자 오하드의 외삼촌인 아드 막 키나다(Áed mac Cináeda)가 사망한 후,[47][48] 오하드는 기릭과 함께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된다.[54]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기릭이 오하드의 양아버지(alumnusla)[54][55]이자 보호자(ordinatorla)[54][56] 역할을 하며 공동으로 통치했다고 전하지만,[50] 12세기의 ''베르찬의 예언''은 오하드가 13년간 통치하다 쫓겨나고 기릭이 뒤를 이었다고 다르게 기록하며, 오하드의 브리튼 혈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다.[71][72]
오하드와 기릭이 통치했던 시기(대략 878년~889년)[59][68]는 픽트 왕국 역사에서 알피니드 왕조의 직접적인 통치가 잠시 중단된 유일한 기간이다.[164] 이 시기는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기였으며,[143] 이러한 격변 속에서 픽트 왕국은 점차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기릭은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왕위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전 달 리아타 왕국의 게일 세력을 규합하여 픽트 왕국 내 게일족의 영향력을 강화했을 수도 있다.[143]
오하드와 기릭이 889년경 추방된 후,[54] 돔날 막 쿠스탄틴(Domnall mac Custantín)이 왕위를 계승했다.[127] 중요한 점은 동시대 연대기 자료에서 돔날을 최초로 '알바의 왕'(rí Albanmga)으로 칭했다는 것이다.[129] 이 시기를 기점으로 '픽트족'(Pictila), '픽트족의 왕'(rex Pictorumla)과 같은 라틴어 용어 사용이 줄어들고,[137] 게일어인 '알바의 사람들'(fir Albanmga), '알바의 왕'(rí Albanmga)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139]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서도 돔날의 통치 이후 왕국의 명칭이 Pictaviala에서 Albaniala로 바뀐다.[140] ''앵글로색슨 연대기''와 같은 외부 기록에서도 9세기 말 이후 '픽트족' 대신 '스코트족'(Scottasang)이라는 용어가 북부 브리튼의 주민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133][134]
이러한 용어의 변화는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 픽트족 중심의 왕국에서 벗어나 게일족, 브리튼족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을 포괄하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 즉 '알바 왕국'의 등장을 시사할 수 있다.[151] 알피니드 왕조의 일시적 단절과 아일랜드와의 연관성(돔날의 고모 마엘 무이레(Máel Muire)는 아일랜드 왕들과 결혼했고,[147] 돔날과 그의 사촌 쿠스탄틴(Custantín) 역시 아일랜드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146])은 이러한 게일화 과정을 촉진했을 수 있다. 오하드와 기릭의 통치는 이러한 변혁의 촉매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기릭이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정복했다는 후대의 기록은[152] 실제 정복보다는 그의 통치 하에 다민족적인 북부 동맹이 형성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으며,[151] '알바'라는 용어 자체가 이러한 새로운 정치체를 포괄하기 위해 채택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51]
또한, 오하드의 통치 시기는 그의 본래 왕국인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남쪽으로 확장하던 시기와 겹칠 수 있다.[115] 알 클루드 요새 함락 이후 스트래스클라이드는 노섬브리아 왕국의 쇠퇴를 틈타 컴브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을 가능성이 있으며,[119] 이는 고반 지역에서 발견되는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조각품들에서 나타나는 컴브리아인과 스칸디나비아인 간의 협력 관계에 의해 촉진되었을 수 있다.[120][122] 오하드가 픽트와 브리튼 양쪽의 왕위를 가졌던(혹은 주장했던) 시기에 이러한 스트래스클라이드의 확장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북부 브리튼 전체의 세력 재편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125]
결론적으로 오하드 막 룬은 스코틀랜드 왕국 형성사에서 직접적인 주역으로 평가받기는 어렵지만, 그의 통치 시기는 픽트 왕국이 해체되고 게일족의 영향력이 강화되며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는 알바 왕국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과도기였다. 그의 브리튼계 혈통과 픽트 왕위 계승, 그리고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확장 가능성은 당시 북부 브리튼의 복잡한 정치 지형과 스코틀랜드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6. 2. 후대 왕 목록에서의 누락
에오카이드는 '알바 왕 연대기'와 '베르찬의 예언'에서만 언급될 뿐,[161] 후대의 중세 왕 목록이나 연대기에서는 그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162] 이는 기릭과 달리 에오카이드가 스코틀랜드 역사 기록에서 배제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에오카이드와 후대의 알라브 막 일루일브는 왕 목록에 기록되지 않은 유일한 알바의 왕들이다.[163]에오카이드와 기릭이 통치했던 시기는 케네스 1세(키네드 막 알핀)부터 말 콜룸 2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알핀 왕조가 픽트 또는 알바 왕위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공백기였다.[164] 이러한 왕위 단절과 에오카이드의 누락은 알핀 왕조가 당시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을 가능성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146] 돔날 2세와 그의 사촌 콘스탄틴 2세 같은 알핀 왕조의 후계자들이 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면,[146] 그들의 관점을 반영하는 아일랜드 연대기가 에오카이드와 기릭의 통치를 정통성 없는 찬탈로 간주하여 기록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을 수 있다.[149]
에오카이드는 889년 추방된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으며,[165] 그의 사망 시점이나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166][167] 한편 기릭은 던던에서 살해된 것으로 전해지는데,[168] 만약 당시 에오카이드가 기릭과 동맹 관계였다면 함께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도 있다.[176] 또는 기릭의 죽음이 에오카이드의 축출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177] 기릭을 살해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핀 왕조의 돔날 2세가 유력한 배후로 지목되기도 한다.[178]
6. 3. 역사적 평가
에오카이드의 통치 시기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확장기를 맞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때와 겹친다.[115][116] 일부에서는 에오카이드가 이러한 왕국의 남부 확장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123] 또한, 그의 시대에는 픽트 왕국과 브리튼 왕국이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으며,[124] 두 왕국의 연합이 브리튼의 권위를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다.[125] 이 시기는 픽트족의 왕국이 점차 알바로 알려지게 되는 중요한 전환기였을 수 있으며,[131][142] 에오카이드와 그의 공동 통치자로 여겨지는 기릭의 통치가 이러한 변화, 즉 게일족, 브리튼족 등을 아우르는 새로운 다민족적 정치체 형성 시도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151]그러나 에오카이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은 '알바 왕들의 연대기'와 '베르찬의 예언' 등 소수의 문헌에만 단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161] 함께 통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릭이 후대에 게일 교회를 해방시키고 군사적 정복을 이룬 인물로 전설처럼 기록된 것과는[155][156] 대조적으로, 에오카이드는 후대의 주요 왕 목록이나 연대기에서 종종 누락되었다.[162] 이는 그가 스코틀랜드 역사 서술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인식되었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에오카이드와 기릭의 통치기는 알피니드 가문이 픽트 또는 알바의 왕위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시기였으며,[164] 이는 후대의 알피니드 왕조 중심의 역사 기록에서 그들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부정적으로 그려졌을 수 있는 배경이 된다.[149]
에오카이드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889년 추방되었다는 기록 이후 그의 행적은 불분명하며,[165] 사망 날짜나 경위 역시 기록되지 않았다.[166][167] 기릭이 던던에서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168] 만약 두 사람이 당시까지 동맹 관계였다면 에오카이드 역시 기릭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이 있다.[176] 다른 가능성으로는 기릭의 죽음이 에오카이드가 왕위에서 완전히 축출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177] 그의 후계자인 돔날 막 쿠스탄틴이 기릭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추측도 존재한다.[178]
비록 에오카이드 자신에 대한 기록은 희소하지만, 그의 혈통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10세기 초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으로 기록된 어떤 드프날이 에오카이드의 아들이거나 손자일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181][184][183] 또한 일부 문헌에서는 그에게 니얼 글룬두브와 결혼한 라안(Laan)이라는 딸이 있었다고도 전한다.[186] 이러한 기록들은 에오카이드의 영향력이 그의 사후에도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이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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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The Annals of Ulster (2017) § 900.6; The Annals of Ulster (2008) § 900.6; Bodleian Library MS. Rawl. B. 489 (n.d.)"
"#T2"
[127]
문서
Woolf (2007) pp. 122–123; Hudson, BT (1998) pp. 149, 155; Anderson, AO (1922) pp. 395–396; Skene (1867) p. 9
"#W2"
[128]
문서
"The Annals of Ulster (2017) § 900.6; Chronicon Scotorum (2012) § 900; Chronicon Scotorum (2010) § 900; Woolf (2007) p. 122; The Annals of Ulster (2008) § 900.6"
"#T2"
[129]
문서
Evans (2015) p. 151 n. 96; Walker (2013) ch. 1 ¶ 50; Clarkson (2012a) ch. 8 ¶ 24; Clarkson (2012b) ch. 11 ¶ 48; Anderson, MO (2010) p. 124; Clarkson (2010) ch. 8 ¶ 26; Hadley (2009) p. 203; Charles-Edwards (2008) p. 170; Broun (2007) pp. 21, 33 n. 115; Woolf (2007) p. 320 n. 18; Charles-Edwards (2006) p. 343 n. 2; Clancy (2006a); Forsyth (2005) p. 32; Broun (2004b); Foster (2004) p. 108; Davidson (2002) p. 128; Bruford (2000) p. 59; Woolf (2000) p. 151; Veitch (1998) p. 199 n. 34; Bannerman (1997) p. 35; Lynch (1991) p. 40; Williams; Smyth; Kirby (1991) p. 103
"#E1"
[130]
문서
Downham (2017) p. 91; Koch (2006a); Broun (1997) p. 113 n. 6
"#D26"
[131]
문서
Charles-Edwards (2008) p. 170; Broun (2007) pp. 72–75; Broun (2004b); Broun (1997) p. 113 n. 6
"#C2"
[132]
문서
"O'Keeffe (2001) p. 43; Cotton MS Tiberius B I (n.d.)"
"#O7"
[133]
문서
Woolf (2009) p. 251; Charles-Edwards (2008) pp. 170, 187; Swanton (1998) p. 82; Thorpe (1861) pp. 160–161
"#W4"
[134]
문서
Charles-Edwards (2008) pp. 170, 187; Swanton (1998) pp. 104–105; Thorpe (1861) pp. 196–197
"#C2"
[135]
문서
Woolf (2009) p. 251; Charles-Edwards (2008) pp. 170, 187; Woolf (2007) pp. 117, 124; Swanton (1998) pp. 74–75; Thorpe (1861) pp. 144–145
"#W4"
[136]
문서
"The Irish Version of (2015) § historia 27; The Irish Version of (2009) § historia 27; Woolf (2007) p. 124"
"#T7"
[137]
문서
"The Annals of Ulster (2017) §§ 875.3, 876.1, 878.2; Broun (2015b) p. 120; Chronicon Scotorum (2012) § 876; Chronicon Scotorum (2010) § 876; Charles-Edwards (2008) pp. 170, 187; The Annals of Ulster (2008) §§ 875.3, 876.1, 878.2; Broun (2007) pp. 84, 89 n. 6; Charles-Edwards (2006) pp. 326 § 875.3, 326 § 876.1, 328 § 878.3, 343 n. 2; Davidson (2002) p. 128; Bruford (2000) p. 59 n. 52; Broun (1997) p. 112, 122 nn. 2–3, 122 n. 50"
"#T2"
[138]
문서
Woolf (2009) pp. 251–252; Broun (2007) p. 72; Woolf (2007) pp. 117, 340; Broun (1997) p. 112
"#W4"
[139]
문서
"The Annals of Ulster (2017) §§ 900.6, 918.4; Broun (2015b) pp. 119–120; Chronicon Scotorum (2012) § 900; Chronicon Scotorum (2010) § 900; Charles-Edwards (2008) pp. 170, 187; The Annals of Ulster (2008) §§ 900.6, 918.4; Broun (2007) pp. 21, 33 n. 115, 72, 84, 89 n. 6; Charles-Edwards (2006) p. 343 § 900.9, 343 n. 2; Broun (2004b); Duncan (2002) p. 14; Davidson (2002) p. 128; Bruford (2000) p. 59, 59 n. 52; Broun (1997) pp. 112, nn. 2–3, 124 n. 56; Ó Murchadha (1992–1993) p. 59"
"#T2"
[140]
문서
Anderson, MO (2010) p. 124; Charles-Edwards (2008) pp. 170, 180, 187; Broun (2007) pp. 72–73, 84–85; Charles-Edwards (2006) p. 343 n. 2; Foster (2004) p. 108; Woolf (2000) pp. 151–152; Broun (1997) p. 118 n. 33; Lynch (1991) p. 40
"#A2"
[141]
문서
O'Keeffe (2001) p. 77; ''Cotton MS Tiberius B I'' (n.d.)
[142]
문서
Broun (2007) p. 73; Broun (2004b); Broun (1997) pp. 115, 123–124
[143]
문서
Woolf (2007) pp. 321, 340–342, 351
[144]
문서
''The Annals of Ulster'' (2017) § 807.3; ''The Annals of Ulster'' (2008) § 807.3; Woolf (2007) p. 59
[145]
문서
''The Annals of Ulster'' (2017) § 913.1; ''The Annals of Ulster'' (2008) § 913.1; ''Bodleian Library MS. Rawl. B. 489'' (n.d.)
[146]
문서
Woolf (2007) pp. 321–322
[147]
문서
Clarkson (2012a) ch. appendix a; Clarkson (2012b) ch. genealogical tables; Broun (2007) p. 96 n. 84; Woolf (2007) pp. 257 tab. 6.6, 321–322; Herbert (2000) pp. 68–69; Broun (1997) p. 117; Hudson, BT (1998) p. 157 nn. 41–42; Hudson, BT (1996) pp. 120, 134; Hudson, BT (1994) p. 171 genealogy 4
[148]
문서
Woolf (2007) pp. 257 tab. 6.6, 321–322; Bhreathnach (2005) p. 269; Hudson, BT (2004b); Herbert (2000) pp. 69–70; Hudson, BT (1998) p. 157 n. 42; Hudson, BT (1996) pp. 120, 134, 148; Hudson, BT (1994) p. 171 genealogy 4
[149]
문서
Woolf (2007) p. 124
[150]
문서
Foster (2004) p. 8 ill. 1
[151]
문서
Evans (2015) 151 n. 96; Charles-Edwards (2008) pp. 178–179
[152]
문서
Charles-Edwards (2008) pp. 177, 179; Woolf (2007) p. 120; Veitch (1998) p. 211; Hudson, BT (1996) p. 206; Macquarrie (1990) p. 7; Cowan (1981) p. 10; Anderson, AO (1922) pp. 364–365, 365 n. 2; Skene (1867) pp. 151, 174, 204, 288, 301, 305
[153]
문서
Davidson (2002) pp. 128–129, 159; Herbert (2000)
[154]
문서
Evans (2015) p. 151 n. 96; Broun (2015b) pp. 122–124; Broun (2007) pp. 86–87; Broun (1997) p. 123 n. 54
[155]
문서
Broun (2015d); Walker (2013) ch. 1 ¶ 48; Woolf (2007) pp. 120, 320; Broun (2004c); Hudson, BT (1996) p. 206
[156]
문서
Broun (2015d); Terrell (2011) p. 338, 338 n. 50; Charles-Edwards (2008) pp. 177, 179; Broun (2004c); Woolf (2007) p. 120; Veitch (1998) p. 211; Hudson, BT (1996) p. 206; Clancy (1996) p. 125; Anderson, AO (1922) pp. 364–365, 365 n. 2; Skene (1867) pp. 151, 174, 204, 288, 301, 305
[157]
문서
Woolf (2007) p. 120 n. 55
[158]
문서
Woolf (2007) p. 120 n. 55; Watson (2002) pp. 175, 183
[159]
문서
Edmonds (2015) p. 60; Hudson, B (2014) p. 89; Woolf (2007) p. 120; Clancy (1996) p. 121
[160]
문서
Hudson, B (2014) p. 89; Woolf (2007) p. 120; Veitch (1998) pp. 198, 207; Clancy (1996) p. 122; Hudson, BT (1996) p. 206; Wormald (1996) pp. 142, 150; Haddan; Stubbs (1873) p. 283; Forbes (1872) p. xliii
[161]
문서
Hudson, BT (2002) p. 49; Hudson, BT (1996) p. 206
[162]
문서
Hudson, BT (2002) p. 49
[163]
문서
Hudson, BT (1990) p. 107 n. 21
[164]
문서
Broun (2015b) p. 187; Lynch (1991) p. 42
[165]
문서
Clarkson (2010) ch. 9 ¶ 3
[166]
문서
Woolf (2007) p. 123; Macquarrie (1998) pp. 13–14; Macquarrie (1990) p. 8
[167]
문서
Hudson, BT (1994) p. 163 tab. 1a
[168]
문서
Hudson, B (2014) p. 99; Konstam (2010) p. 36; Woolf (2007) pp. 120 n. 55, 125; Clancy (1996) p. 125; Alcock; Alcock; Driscoll (1989) pp. 192–194; Driscoll, ST (1987) pp. 178–179, 193; Skene (1867) pp. 151, 174, 178, 288, 301
[169]
문서
Hudson, BT (1996) pp. 45 § 139, 86 § 139, 206–207; Anderson, AO (1930) p. 41 § 137; Anderson, AO (1922) p. 367; Skene (1886) p. 330 n. 107; Skene (1867) p. 88
[170]
문서
Grant (2000) p. 97
[171]
문서
Alcock; Alcock; Driscoll (1989) p. 194
[172]
문서
Driscoll, ST (2001b)
[173]
문서
Clancy (2009) p. 28; Woolf (2007) p. 109; Driscoll, ST (2003) p. 81; Driscoll, ST (2001a); Duncan (1996) p. 90
[174]
문서
Oram (2008) p. 169; Driscoll, ST (1998b) p. 40
[175]
문서
Oram (2008) p. 169
[176]
문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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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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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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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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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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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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